[일의 이름] 전문직에서 경계가 필요한 순간

수필 · 2025. 5. 4.

건축사로 일할 때도, 변호사로 일할 때도, 저는 종종 일과 나 자신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들을 마주하곤 했습니다. “이건 어차피 내 도면이니까”, “이건 내 이름으로 나가는 자문이니까.” 처음엔 책임감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일이 곧 나이고, 내가 곧 일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집중력은 높아졌지만, 그만큼 소진도 빨랐습니다. 저는 점점 일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전문직이라는 이름은 종종, 자기희생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곤 합니다. ‘좋은 건축사’, ‘신뢰받는 변호사’는 항상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먼저 듣고, 밤늦게라도 연락이 닿아야 하며, 최종 결과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그 말들이 완전히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말들이 암묵적으로 이렇게 이어질 때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언제든 준비돼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을 너무 오래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그 말을, 스스로에게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저는 이제 전문직일수록 일과 나 사이의 ‘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서부터가 일인지 구별하는 감각. 그것은 도망치기 위한 선이 아니라,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할 경계입니다. 업무 시간 이후에는 메일을 열지 않겠다는 선택, 클라이언트의 감정을 내 책임처럼 끌어안지 않겠다는 태도, 도면에 대한 평가가 내 존재 전체에 대한 평가처럼 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 일. 그런 사소한 구분들이, 제가 무너지지 않고 오래 일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작은 기술이 되었습니다.

경계는 멀어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지키기 위한 거리입니다. 경계를 긋는 사람만이 상처 없이 오래 일할 수 있고, 건강한 방식으로 책임질 수 있으며, 일 외의 삶도 함께 안아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서부터가 ‘일’인가요?

2025.05.04.

이 규 황

변호사 |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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