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을 흔드는 보이지 않는 손, 건설감정]
여러 드라마에서 표현되는 모습과는 다르게, 법정은 오직 서면과 증거으로 소통하는 차가운 공간입니다. 법정에 들어서는 변호사들은 법리로 무장하고 싸우고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콘크리트 슬러지나 누수의 원인이 된 균열의 상태 같은 기술적인 다툼에 관하여 독자적으로 판단할 능력은 대부분 없습니다. 기술적으로 밝혀내야만 하는 실체적 진실과 동떨어진 법리적 다툼이 만들어낼 괴리를 메우기 위해, 법원은 건축사나 시공기술사 같은 현장 전문가를 지정하는데 이들이 바로 법복을 입지 않은 제3의 판사, 건설감정인입니다.
실무자들이 건설소송에 들어갈 때에는 흔히 “우리가 정당하게 일한 것을 판사님께서 당연히 알아 주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곤 합니다. 하지만 냉정한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건설 소송 판결문의 내용은 판사가 감정 결과서를 받아 드는 바로 그 순간, 이미 90% 이상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판사는 선정된 감정인이 기술적이고 전문적인 견지에서 내린 결론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대로 인용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러분이 재판에서 승리하기 위해 설득해야 하는 대상은 법대 위의 판사이기 이전에, 여러분의 현장을 샅샅이 도해해 나갈 감정인이어야 합니다.
일단 법정에 들어간 이상, 모든 것을 건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한 첫 번째 분수령은 감정의 기준을 정하는 감정인신문기일에서 확정된 전제사실입니다. 당사자 대다수가 이 기일을 그저 감정일정을 잡는 요식행위로 치부하고 대리인에게만 맡겨둔 채 방치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단계는 재판부가 감정의 기준시점과 기준도면, 그리고 구체적인 품셈의 산출 방식 등 감정서의 작성에서 가장 중요한 여러 가지 사안들을 공식적으로 지정하는 가장 중요한 시점입니다. 예를 들어, 기성비율에 따른 공사대금 청구 소송이나 추가공사 분쟁에서 가격을 산정하는 기준시점을 ‘공사 완료 및 인도 시’로 묶느냐, 혹은 ‘소 제기 시’로 묶느냐에 따라 투입된 인건비와 자재비의 총량은 수억 원 단위로 춤을 출 수 있습니다. 또한, 하자를 논할 때 기준으로 삼을 도면이 ‘착공도면’인지, 행정 절차가 최종 반영된 ‘사용검사도면(준공도면)‘인지에 따라 시공의 완결성 여부가 완전히 뒤바뀝니다. 감정절차에서 감정인은 오직 법원에서 지정한 감정신청사항과 확정된 전제사실의 틀 안에서만 기술적인 판단을 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기일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기술적 지표와 올바른 준공내역서 기준을 전제로 박아두지 못한다면, 이후에 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해 봐야 감정인은 “법원이 정하고 당사자들이 합의한 전제사실와 달라 반영할 수 없다”는 차가운 답변만을 내놓을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겠지요.
두 번째는 ‘현장조사’ 단계입니다. 현장조사는 감정인이 눈으로 직접 부실시공과 하자여부를 계측하는 거의 유일한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이때 현장 실무자들이 범하는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감정인을 대접하겠다는 명목으로 은밀한 사적 접촉을 시도하거나, 반대로 현장 대응 준비를 소홀히 한 채 감정인과 거친 감정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최신 사법 실무의 척도가 되는 서울중앙지방법원의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감정인은 당연하게도 원·피고 중 한쪽과의 개별적인 접촉을 철저히 지양하도록 강제하고 있으며, 현장에서 일어난 모든 접촉 일정과 회의 내용, 가능하면 구체적인 대화까지 빠짐없이 서면에 기록하여 재판부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섣부른 태도로 공정성에 의구심을 사는 순간 여러 가지 불필요한 소송상의 손해를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감정인이 짧은 조사 시간 동안 방대한 현장을 정확히 짚어낼 수 있도록 쟁점별 데이터와 도면, 공간별 체크리스트를 완벽하게 정제하여 제공하는 것입니다. 숫자로 가득 찬 감정서의 뒤에는 결국 현장에서 실무자가 보여준 성실함과 정교한 기록이 단단한 기초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수 개월을 기다려 받아 든 감정 결과서가 우리 예상과 다르게 나왔다고 해서 그대로 모든 것을 포기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단계인 ‘감정보완’ 또는 ‘사실조회’ 절차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감정인도 결국 사람이고, 사람이 하는 물량 산출과 품셈 적용 등 여러 가지 계산에는 당연히 빈틈이 생길 수 있습니다. 실무에서 가장 빈번하게 터지는 오류는 현장의 특수성을 무시한 채 조달청 제비율이나 표준품셈을 기계적으로 인용하여 단가를 과소 산출하거나, 복잡한 층고와 장비 반입 여건에 따른 할증 요소를 누락하는 경우와 같이 여러 가지 실수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혹은 추가 공사대금 분쟁인데도 이를 기존 계약의 약정금액 속에 뭉뚱그려 기성고 비율을 엉망으로 꼬아놓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 “결과가 부당하니 억울하다”는 식의 호소는 판사에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감정서를 최종적으로 확정지어야 하는 감정인에게 해야 하겠습니다. 감정인의 기술적인 의견을 다투려는 당사자로서는 철저하게 기술적인 허점을 찔러야 합니다. “감정인은 A 단가를 적용했으나, 이 사건 현장의 구체적인 설계 도서 지침과 실제 투입 물량 산출 근거를 대조해 볼 때 제비율 적용에 중대한 누락이 있으니 원가일체형 내역서의 오류를 보완해 달라”는 등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반박을 펼치며 ‘감정보완’을 통해 구제를 받아야 합니다. 정교하게 가다듬은 반박 서면은 판사의 심증을 흔들고 수억 원의 판결 금액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열쇠가 됩니다.
건설감정서는 따분한 기술자들이 기계적으로 찍어내는 기술검토보고서 따위가 아닙니다. 유리한 감정보고서를 받아내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설명들을 법정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해내는 치열한 설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력을 가졌더라도 법이 정한 절차의 생리를 이해하지 못해 정당한 권리를 박탈당한다면 실무자에게는 그보다 큰 비극이 없을 것입니다. 감정인의 펜이 움직이는 규칙을 명확히 읽어내고, 감정기일부터 마지막 보완 서면까지를 기록으로 상세히 현출하여 원하는 증거를 만들어 내야만 피땀 흘려 일한 대가를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습니다. 모든 재판은 마지막 순간까지 집중력을 놓지 않는 사람이 승리를 가져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026.05.24.
변호사 | 건축사
이 규 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