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활] 내가 한 해 동안 남긴 흔적들을 돌아보며
한 해의 끝자락에 서면 문득,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어떤 날은 길게 남았고, 어떤 날은 아무 자취 없이 흘러갔습니다. 남은 건 사진 몇 장과 일정표, 그리고 수많은 문서들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제 인생은 늘 기록 속에서 흘러왔던 것 같습니다. 건축을 하던 시절에는 도면으로, 법을 하게 된 뒤로는 문서로 하루를 채웠습니다. 도면에는 한 사람의 생각이 선으로 남고, 법률 문서에는 한 사건의 마음이 문장으로 남습니다. 기록은 언제나 결과 같지만, 사실은 그때의 고민과 흔들림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또 하나의 삶의 형태입니다.
책상 위에는 올해 쓴 계약서와 자문서, 그리고 몇 권의 노트가 쌓여 있습니다. 정리할 때마다 묘한 감정이 듭니다. 한때는 치열했던 일들이, 이제는 활자 몇 줄로만 남아 있습니다. 그 문장들을 읽다 보면, 그 안에 있었던 제 표정과 목소리, 그때의 공기까지도 함께 떠오릅니다. 기록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감정의 껍질을 벗고 남는 기억의 형태 같습니다. 처음에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쓰지만, 결국은 잊지 않기 위해 쓰게 됩니다. 일의 기록이 쌓이면서 어느새 그것이 제 인생의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늘 기록으로 자신을 지탱해 왔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하루를 정리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했고, 남긴 문서가 있어야 비로소 일의 끝이 보였습니다. 기록은 제게 일종의 버팀목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기록이 저를 조여 왔습니다. 완벽한 정리, 깔끔한 마무리를 반복하다 보니, 문서 속에서는 숨이 막히고 사람의 온기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조금 다르게 남기려 합니다. 결과보다 과정의 흔적을, 정확함보다 그때의 마음을 더 남기려 합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글을 쓰면서 생각이 정리되고, 문장을 다듬으면서 마음이 다스려집니다. 기록은 나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나를 돌보는 글입니다. 그렇게 쌓인 문장들은 어느새 제 안의 기억을 정리해 주는 조용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이 기록들을 다시 읽을 때, 그 속에서 지금의 저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흔들리던 마음, 지쳐 있던 표정, 다시 일어서려던 순간들이 이 안에 모두 담겨 있을 테니까요.
한 해를 정리하며 문득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가 남길 수 있는 건 기록이 아닐까요. 말은 사라지고 기억은 흐려져도, 글로 남긴 마음은 묘하게 오래 남습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도 이렇게 몇 편의 글을 남깁니다. 이 글들이 완벽한 문장으로 남지 않더라도, 이 시절의 저를 닮아 있기를 바랍니다. 불안과 쉼, 관계와 거리, 그리고 그 모든 감정들 속에서 흔들리며 살아가던 서른다섯의 제가 이 기록 안에 살아 있기를.
삶은 언젠가 모두 사라질 일이지만, 기록은 그 사라짐 속에서도 방향을 남깁니다. 언젠가 다시 이 문장들을 펼쳐 보게 될 때, 지금보다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더 따뜻한 마음으로 웃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까지 저는 또 하루를 기록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2025.12.26.
변호사 | 건축사
이 규 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