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감정] 법정 밖의 인간성 – 기록에 다 담을 수 없는 것들

변호사 · 2025. 11. 20.

법정 안에서는 모든 것이 기록으로 환원됩니다. 말은 조서로 바뀌고, 표정은 남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울고 웃던 흔적은 전부 활자 속으로 들어가고, 진심은 ‘진술’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서가 판결의 근거가 되고, 재판은 그 문서 위에서만 움직입니다. 법은 냉정해야 하고, 그 냉정함 덕분에 공정함이 유지됩니다. 하지만 문서를 덮고 법정을 나서는 순간, 그 차가운 공정함이 얼마나 외로운 언어인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법정 밖의 세계는 그와 다릅니다. 세상은 증거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말의 온도와 눈빛의 방향, 망설임과 한숨, 그 모든 것들이 관계를 지탱하고 세상을 이어 줍니다. 누군가는 계약서보다 약속의 말을 더 믿고, 누군가는 서명보다 침묵 속의 신뢰를 더 소중히 여깁니다.


그렇게 인간의 세계는 여전히 문서로 완전히 옮겨질 수 없는 감정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나는 일을 하며 종종 그 두 세계의 경계를 느낍니다. 재판정 안에서는 서로를 향해 단호하게 말하던 사람들이, 판결이 끝난 뒤 복도에서 서로를 마주 보면 조용히 눈을 피하거나, 아주 작은 목소리로 “고생 많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에는 승패가 없습니다. 그저 한 인간으로서 서로의 무게를 알아본다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온기가 있습니다. 서류 속에서는 피고와 원고였던 사람들이, 법정 밖에서는 다시 사람 대 사람으로 돌아옵니다.

모든 절차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남는 건 판결문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입니다.


법이 다루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신뢰, 미안함, 부끄러움, 용서 같은 감정들은 어떤 문서에도 그대로 적히지 않습니다. 그건 법의 언어로 올바로 번역되지 않는 영역이자, 동시에 우리가 인간으로 남게 하는 마지막 경계입니다. 저는 변호사로서 늘 기록과 증거의 세계에 살지만, 한 사람으로서는 여전히 증명되지 않아도 진실일 수 있는 마음들을 믿습니다. 세상에는 증거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고,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그걸 모르는 법률가는 없지만, 그것을 법이 다뤄서는 안 된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법정 안에서는 증거가 전부입니다. 그러나 법정 밖에서는 한마디의 말이, 한 번의 손짓이, 때로는 한 줄의 미안함이 모든 것을 바꿉니다. 법은 정의를 세우지만, 인간성은 사회를 세웁니다. 법은 옳고 그름을 나누지만, 인간성은 이해와 용서를 남깁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은, 어쩌면 그 두 세계 사이에서 계속 균형을 잡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오늘도 법으로만 사람을 이해하려 들지는 않았는가.” 변호사로서 정의를 세우는 일에 익숙해질수록, 한 사람으로서 따뜻함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판결로는 관계를 바로 세울 수 없고, 조항으로는 마음을 다잡을 수 없습니다.

그건 결국 서로의 언어로,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중으로만 회복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법으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법이 세운 질서 위에서, 여전히 사람의 말과 표정과 침묵이 세상을 부드럽게 이어 줍니다. 법이 정의를 세운다면, 인간성은 그 정의에 온기를 더합니다. 그래서 나는 법정을 나설 때마다 조용히 마음속으로 되뇌입니다. 공정함으로는 사람을 판단할 수 있지만, 인간다움으로만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2025.11.20.

변호사 | 건축사

이 규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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