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오류] 계약서 속 책임제한 조항, 건축주와 건축사 사이의 균형점
계약서를 쓰는 순간은 보통 서로 신뢰를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법적 분쟁은 바로 그 신뢰가 흔들릴 때 발생합니다. 설계계약서 안에서 자주 등장하는 조항 중 하나가 “책임제한 조항”입니다.
설계자의 손해배상책임은 계약금액을 한도로 한다
라는 문구인데, 이 조항은 건축주와 건축사 모두에게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집니다.
건축주의 입장에서는, 이 조항이 자칫 불공정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설계비가 공사비에 비하면 적은 비율에 불과한 상황에서, 설계 오류로 인하여 수십 배의 추가 공사비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설계비가 1억 원인데, 설계 오류로 10억 원의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면, 책임이 설계비 한도로 제한된다면 건축주는 막대한 비용 지출의 부담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래서 계약 단계에서 이러한 조항은 건축주에게 위험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건축사의 입장에서는, 모든 위험을 무제한으로 부담할 수 없다는 점이 현실입니다. 설계 과정에는 불확실성이 존재하고, 발주자의 변경 요구나 시공 과정의 변수도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건축사가 받는 설계비 규모에 비해, 무제한의 책임을 지는 구조라면 이는 설계업계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책임제한 조항은 건축사에게는 일종의 생존 장치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법원은 이러한 조항을 무조건 유효하다고 보지도, 항상 무효라고 보지도 않습니다. 대체로 경미한 과실에 대해서는 제한을 인정하는 반면, 중대한 과실이나 고의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면제해 주지는 않습니다. 또한, 건축주의 권리를 과도하게 제한한다고 판단되면 공서양속 위반으로 무효로 선언되기도 합니다. 결국 사안별로 판단되는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계약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양 당사자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입니다. 건축주는 최소한 설계상의 중대한 오류에 대해서는 책임제한이 적용되지 않도록 협상해야 하고, 건축사는 책임 범위를 합리적으로 한정하여 불필요한 리스크를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책임 상한을 설계비 기준이 아니라 공사비의 일정 비율로 정하거나, 일정 금액 한도 이상은 보증보험 등으로 보완하는 방법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책임제한 조항은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거나 불리하게만 작용하는 조항이 아닙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공정한 위험 분담에 있는 것입니다. 건축주에게는 내 건축물을 안전하게 지켜낼 안전망이 필요하고, 건축사에게는 지속 가능한 업무환경과 감당 가능한 책임부담에 관한 조건이 필요합니다. 계약서 속 작은 문구 하나를 어떻게 정리하느냐가, 양쪽 모두의 권리와 책임을 균형 있게 지켜내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2025.09.18
변호사 | 건축사
이 규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