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외 업무] 추가용역과 실무적 판단 기준
설계도서를 납품하더라도 모든 업무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계약에 명시된 도면을 마감 기한 내에 제출했고, 발주처도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은 하지만, 그 말이 진짜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로도 “이 부분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현장 조건이 달라졌는데 도면 좀 다시 봐주시겠어요?”, “내일 회의 참석 가능하실까요?” 같은 연락이 이어집니다. 계약은 끝났는데, 업무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추가용역인지도 모를 일’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약서의 업무범위는 ‘기본 및 실시설계’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설계변경은 기본설계에 포함되는 걸까요? 설계 도서 제출 이후에 생기는 질의응답, 회의 참석, 감리자의 설명 요청 등은 어디까지가 ‘계약 범위’에 포함되는 일일까요? 저희는 이 경계에서 늘 고민합니다. ‘이 정도는 해줘야지’라는 말을 들으며 버텨온 일들이, 정작 용역비에 대한 법적 분쟁이 생기면 “그건 계약에 없지 않습니까”라는 반박으로 되돌아옵니다.
반복되는 설계변경 요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두 번의 경미한 수정은 당연히 용역에 포함된 것으로 봐 주어도 되겠습니다만, 조건이 바뀌고, 구조가 바뀌고, 심지어 건물의 배치 자체가 바뀌었는데도 ‘그건 원래 포함된 거잖아요’라는 식으로 넘어가려는 발주처도 적지 않습니다. 계약서 문구에 “수정 및 보완 포함”이라는 말이 있다고 해서 모든 변경을 포함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문제는, 그 기준이 불명확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불명확함이 오히려 실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곤 합니다.
회의 참석, 보고서 작성, 행정기관 대응처럼 ‘도면 그리는 일’은 아니지만, 시간과 노동력이 분명히 들어가는 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건축사님이 그냥 와 주셔야죠”라는 말은 흔하지만, 그 시간을 위해 계약금이 조정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응했던 모든 일들이 나중에는 ‘당연히 포함된 업무’로 간주된다는 점입니다. 해줬더니 당연한 일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 실무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방어선은 만들 수 있습니다. 예컨대 설계범위를 벗어난 변경 요청이 들어왔을 때, “본 요청은 기존 계약 범위를 초과하는 것으로 보이며, 별도 협의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남겨 두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증거가 됩니다. 회의 참석 요청도 마찬가지입니다. 짧은 메일 한 통이, 나중에 업무범위 분쟁 시 판단 기준이 되어 줍니다.
원칙적으로는 계약서에 용역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정해두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어느 업무가 포함되고, 어느 업무는 별도 협의의 대상인지 분명히 해야 불필요한 분쟁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설계·기술 업무는 언제나 계약서 문구만으로는 모두 예측하거나 포괄할 수 없습니다. 현장 조건의 변경, 제도나 법령의 개정, 발주처 내부 사정의 변화, 예상치 못한 민원 발생 등은 실무자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업무가 자연스럽게 확장되기도 합니다. 계약서에서도 마찬가지로 ‘납품 후 지원업무’명목으로 포괄적인 지원을 예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법적으로는 이런 경우, 당사자 간 ‘묵시적 계약’이 성립했는지, 또는 기존 계약의 ‘신의칙상 부수의무’로 포함되는 범위인지가 쟁점이 됩니다. 즉, 예외적 상황에서 발생한 업무가 계약 체결 당시 당사자가 예상할 수 있었는지, 그 업무가 주된 계약 목적의 이행에 불가피했는지, 반복적으로 수행되었는지, 상대방도 이를 용인하고 있었는지 등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게 됩니다. 결국 법원은 ‘해당 업무를 포함시키는 것이 공정한 계약 해석인가’라는 관점에서 판단합니다.
이처럼 실무에서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은 업무가 발생했다면, 그것이 곧바로 추가용역이냐 아니냐를 단정짓기보다, 위와 같은 사정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필요하다면 명시적 합의를 요청하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법은 정해진 문구에만 갇혀 있지 않지만, 정해진 문구가 없을 때는 기록이 해석의 출발점이 됩니다.
사실 계약서 한 장이 모든 걸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업무의 범위’는 종이에 쓰인 문장만으로 완전히 규정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실무자의 판단과 기록이 중요합니다. 구두로 주고받은 업무 지시, 해달라고 요청받은 일, 반복된 도면수정의 맥락은 누군가 반드시 기억하고 남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모든 일의 책임만이 우리에게 남습니다.
도면은 납품이 되었어도, 일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일이 내 일이었는지’는 분명히 해 두어야 합니다.
2025.07.06.
이 규 황
변호사 | 건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