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설계를 하는가 (16)_건축가의 침묵

건축사 · 2025. 4. 26.

건축가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아는 것을 다 말하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들이 너무 많고, 말해봤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너무 자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수십 번 도면을 수정하면서도 그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고, 발주처의 과도한 요구에도 적당히 선을 그어 반영하고, 감리자나 시공자와의 의견 충돌도 가능하면 부드럽게 정리합니다. 설계회의 자리에서도 건축가는 때때로 말하지 않고, 그냥 도면을 펴서 그려 보여줍니다. 도면이 곧 말이기 때문입니다. 말보다 선이 먼저 나가고, 설명보다는 표현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묻습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까?” “당신도 분명 그 자리에 있었잖아요.” 건축가의 침묵은 종종 책임의 영역으로 끌려 들어옵니다.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동의한 것으로 간주되고, 설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임이 부여됩니다. 반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건축가는 어느새 모든 결정에 책임지는 사람으로 서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회의 중에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지를. 여러 사람이 서로 자기 입장만 말하는 회의 속에서, ‘설계자’라는 이유로 조용히 정리만 하는 역할을 요구받는 현실을. 그런 자리에서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공기를 만드는지를. 그래서 우리는 침묵을 선택합니다. 거칠게 부딪히지 않고, 도면에서 정리하겠다는 식으로 표현을 미룹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나중에 반드시 건축가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건축가는 말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단지 말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할 때를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침묵해야 할 때와, 침묵해서는 안 될 때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도면을 둘러싼 판단에서, 그 판단의 구조가 잘못되었을 때, 그 결정이 건축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을 때, 건축가는 반드시 말해야 합니다. 비록 그 자리가 불편하더라도, 설계적 양보가 공간의 질을 해칠 때, 안전을 침해할 우려가 있을 때, 그리고 그 결정이 오롯이 건축가의 책임으로 귀결될 때,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침묵은 쉽습니다.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모두가 원치 않는 말을 꺼내는 것이고, 모두가 동의한 것 같은 흐름을 멈추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건축가는, 그런 순간에도 자신의 판단을 입 밖으로 꺼내 말할 수 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느냐”는 말보다, 그 자리에서 **“이 판단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힘들지만, 그만큼 더 필요합니다.

건축은 팀워크이면서 동시에 책임의 직업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가장 조용했던 사람에게 가장 크게 돌아오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건축가는 도면을 그릴 뿐이라는 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임을 벗을 수 있는 명분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도면을 그렸기에, 말하지 않은 모든 결정이 건축가의 선택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때를 놓치기 전에 말해야 합니다. 나중에 기록을 남기는 것보다, 그 자리에서 판단을 바로잡는 것이 건축가의 일입니다. 그 판단이 고집이라 불리더라도, 그 설명이 지연이라 불리더라도, 건축가는 그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묻지 않을 때 말하는 것. 모두가 넘어가려 할 때 문제를 짚는 것. 조용한 회의 안에서 공간의 질을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설계 과정에서의 건축가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그 언어는 도면뿐 아니라, 목소리로도 존재해야 합니다. 말하지 않는 건축가는 종종 잊혀지지만, 말해야 할 때 말한 건축가는 끝까지 책임의 주체로 기억됩니다. 우리는 그런 건축가가 되어야 합니다.

2025.04.26.

이 규 황

변호사 |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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