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설계 실무자를 위한 기록 관리법(2)_회의록: 기록되지 않으면 없던 일이다

건축사 · 2025. 4. 21.

건축 설계 실무에서 회의는 일상이자 습관입니다. 설계 방향을 논의하고, 발주처의 의견을 조율하고, 감리자나 시공사와 마감 일정을 맞추는 것도 결국 회의에서 이루어집니다. 회의가 없으면 실무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회의가 끝난 뒤, 남는 건 무엇일까요? 파일도 아니고, 문서도 아니고, 메일도 아닌 ‘기억’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고,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거 회의 때 다 정리됐던 거잖아요.”


“분명히 그렇게 하기로 협의됐습니다.”


“팀장님도 옆에서 들으셨어요.”

이 말들이 거짓은 아닐 겁니다. 그 회의는 실제로 있었고, 그 논의도 실제로 오갔을 것이며, 참석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을 겁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고, 그 책임 소재를 따져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 기억은 법적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법정에서 판사가 물어보는 건 오직 하나입니다.

그 회의에서 그런 말이 오갔다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까?

민사소송에서 입증 책임은, 주장하는 사람이 부담합니다. 설계자가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설계했다”고 주장하려면, 그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입증의 수단이 바로 회의록입니다.

회의록은 **“실제로 그런 회의가 있었고”, “거기서 이런 논의가 있었으며”, “그에 따라 이런 결론이 내려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문서입니다.

회의록이 없다면, 회의는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10명이 회의에 참석했다고 해도, 그 중 한 사람만 기억을 다르게 말한다면 그 회의의 내용은 법적으로는 ‘불명확한 주장’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회의록은 반드시 어떠한 형식적인 요건을 갖춘 문서여야 할까요? 꼭 서명과 직인이 찍혀 있어야 할까요? 꼭 회사 로고가 박힌 문서여야만 증거로 쓰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법은 ‘형식’보다는 ‘실질’을 봅니다.

회의록은 정식 문서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회의 직후 요약 메일, 회의 중 작성한 메모, 팀 내 회신 내용, 회의 참석자에게 보낸 회의 내용 정리 등 작성 시점과 참석자가 명확하며, 내용이 구체적인 것이면 충분히 입증 자료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일관성과 작성 시점, 그리고 수신자의 범위입니다.

예를 들어, 회의 직후 이런 메일을 보냈다고 가정해봅시다.


[메일 예시]

제목: [○○프로젝트] 2025.04.21. 설계회의 결과 요약

본문:

회의일시: 2025.04.21. 10:00~11:00

참석자: 발주처 A, 감리 B, 설계팀 C, 구조팀 D

주요 논의사항:

주차장 진입로는 기존 계획안대로 유지

옥상 구조 상세도는 구조팀 의견 반영하여 수정

외장재는 A타일에서 B타일로 변경

후속 조치: 구조도면 수정안 4/23까지 제출, 입면 렌더링 4/24까지 재검토

위 내용에 대한 보완사항 있으면 회신 부탁드립니다.


이러한 메일이 바로 회의록입니다.

반드시 당사자들의 서명이 없더라도, 내용이 구체적이고 작성 시점이 명확하고 참석자 전원이 수신자로 포함돼 있다면, 그 자체로 회의에서 어떤 합의가 있었는지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증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회신을 하면 더 좋고, 회신이 없더라도 그 내용을 바탕으로 실무가 진행되었다면 그 자체로 ‘묵시적 동의’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별다른 의견을 회신하지 않는 발주자에 대하여 계약상의 승인간주를 적용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는 표준계약서에 관한 글에서 이미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회의록이 없는 경우, 생각보다 빠르게 상황이 꼬입니다. 설계 변경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를 따질 수 없고, 시공자의 요구가 과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어렵고, 발주처의 지시가 정당했는지 아닌지를 입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공백은 늘 설계자에게 가장 불리한 방식으로 해석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설계방향을 결정하고 결과물(도면)을 내놓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도면이 바뀌었으면, 왜 바뀌었는지를 설계자가 설명해야 합니다.

그 설명의 시작이 바로 회의록입니다. 설계자는 도면을 그리는 사람인 동시에, 왜 그렇게 그렸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회의록을 작성하는 일은 귀찮고 번거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노력이, 나중에 나 자신을 지키는 일입니다. 일을 잘했느냐보다, 일을 잘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기억은 흐려지고, 말은 바뀝니다.

그러나 회의록은 남습니다.

그리고 법정은 언제나, 기억이 아니라 기록을 믿습니다.

2025.04.21.

이 규 황

변호사 |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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