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소송에서의 입증책임] "그때 발주처와 다 협의해서 진행한 내용입니다"

변호사 · 2025. 4. 19.

“그건 발주처와 다 협의된 거였는데요.”


“회의 때 분명히 그렇게 하라고 지시받았습니다.”


“변경 지시는 그때그때 유선으로 받아 진행하였습니다.”

실무에서 자주 듣는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일이 있었을 겁니다. 분명히 서로 합의했고, 지시했고, 확인했고, 따라서 설계를 수정하고, 공정 일정을 조정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말이 법정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민사소송에서 판사가 궁금해하는 건 단 하나입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하실 수 있습니까?

민사소송은 **‘입증 책임’**에 따라 심리가 진행됩니다. 각자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말하는 당사자 사이에서, 법은 누구의 말이 맞는지를 따지는 게 아니라, 누가 무엇을 주장하고, 주장하는 자가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는 뜻입니다. 입증 책임이 있는 쪽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를 제출하지 못하면, 그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말입니다.

그래서 분쟁을 다툴 때 중요한 건 ‘우리가 옳다’는 확신이 아니라, 그걸 뒷받침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를 얼마나 갖고 있느냐입니다. 그리고 이때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법적으로 의미 있는 증거란, 도장 찍힌 문서나 공문서 같은 형식적인 문서뿐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민사소송에서 재판의 증거로 인정되는 자료는 매우 폭넓습니다. 이메일, 문자메시지, 카카오톡 대화 내용도 보낸 사람, 받은 사람, 일시, 내용이 식별 가능하다면 모두 증거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구두지시를 문자로 확인해 두었거나, 설계 변경을 요청한 내용을 메일로 회신받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유효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회의록이 꼭 정식 양식일 필요도 없습니다. 타이핑된 회의 메모라도, 작성 시점과 작성자, 회의 내용이 일정하게 정리되어 있다면 정황증거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설계 변경의 경우, CAD나 BIM 파일의 최종 수정일자나 버전 이력, 혹은 저장 경로까지도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통화 녹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법은 자신이 대화 당사자인 경우에는 상대방의 동의 없이도 통화 녹음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이 녹음파일은 민사소송에서 합법적인 증거로 제출할 수 있습니다.

업무일지, 사내 보고서, 발주처로부터 받은 회신 공문, 회의 참석자들에게 보낸 메일이나 메신저 캡처까지. 이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재판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결정적 자료가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자료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저장해놨는데요”라고 말하면서 어디 있는지 모르는 자료, “카톡에 있었는데 폰 바꾸면서 날아갔어요”라는 대답은, 법정에서는 곧 “그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메일로 다 보냈다”고 했지만, 정작 보낸 시점이 너무 늦었거나, 제목이 무관해서 찾기 어려웠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또는 “메신저에서 확인받았다”는 말 뒤에, 정작 그 대화 내용이 삭제되어 찾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무자에게는 기록을 남기는 습관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모든 변경 지시는 문서화하고 회신을 받아두어야 합니다. 단 한 줄이라도 “첨부 파일 확인 부탁드립니다”라는 문장을 덧붙여 메일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나중에 분쟁이 생겼을 때 회사의 입장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구두로 협의한 사항은 회의 직후 문자나 이메일로 요약해 두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작업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면, 보고서, 회의자료 등은 클라우드나 서버에 일정한 규칙에 따라 저장해 두고, 버전별로 관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설계 변경은 논의의 이력이 남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은 설계자의 의도와 판단 근거를 입증하는 데 핵심이 됩니다.

작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메모만 해두고 지나가는 경우도 많지만, 그 메모가 훗날 회사를 지키는 핵심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단지 ‘어렴풋이 기억난다’는 말보다, 날짜가 찍힌 메모 한 장이 훨씬 큰 힘을 갖습니다.

설계자는 도면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분쟁이 발생하면, 동시에 그 도면이 왜 그렇게 그려졌는지, 누가 그렇게 지시했는지, 어떤 경위로 변경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설명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기록입니다.

진실은 기억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록 속에 남아야 비로소 법적 효력을 가집니다.

기억은 흐려지지만, 기록은 남습니다.

그리고 법정은 기억이 아니라, 기록을 믿습니다.

지금부터라도, 기록을 남기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그것이 결국, 설계자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방패입니다.

2025.04.19.

이 규 황

변호사 |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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