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통제] 그냥 사인했을 뿐인데: 결재자의 법적 책임
실무에서 “결재는 통과되었습니까?”라는 질문은 흔히 오가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재선 위로 올라간 순간부터는 그 책임이 결재권자에게 넘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분쟁이나 감사, 수사 국면에서도 ‘결재자’의 이름은 생각보다 자주, 그리고 무겁게 등장합니다.
결재란 무엇일까요. ‘보고된 문서에 동의한다’는 의사 표시입니다. 그 문서가 계약안이든, 회신서한이든, 대외공문이든 간에 말입니다. 결재권자의 사인은 단지 도장 하나, 이름 석 자뿐에 그치지 않고, 내용에 대한 확인과 책임을 담은 내부적 의사결정으로 해석됩니다. 실무에서 종종 “저는 내용을 잘 몰랐고, 그냥 결재한 것뿐입니다”라는 항변이 나오지만, 이 주장은 그리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 문서의 중요성, 결재자의 직위, 직무 관련성, 그리고 회사의 의사결정 구조가 함께 고려되기 때문입니다.
결재자는 단순히 행정적 절차를 통과시키는 존재가 아닙니다. 특정 의사결정에 실질적으로 관여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공동으로 부담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결재자가 해당 문서의 내용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회사에 손해가 발생하였다면,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은 물론 경우에 따라 형사상의 배임 혐의로까지 번질 수 있습니다.
민사상 책임은 주로 업무상의 주의의무 위반을 중심으로 판단됩니다. 결재자의 리스크는 상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뉠 수 있습니다. 첫째, 내용을 알지 못한 채 사인한 경우. 책임이 가장 낮을 수 있지만, ‘몰랐음’을 입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둘째, 내용을 알았지만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경우. 주의의무 위반으로 인한 과실이 인정될 수 있으며, 손해 발생이 명확한 경우에는 배상 책임이 따를 수 있습니다. 셋째, 문제의 가능성을 인지하고도 승인한 경우. 실무자와 공동으로 손해에 대한 책임을 질 가능성이 높아지며, 내부 통제를 형해화시켰다는 점에서 조직 내부의 책임 추궁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형사상 (업무상)배임죄의 문제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배임죄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되는 행위로 재산상 손해를 발생시킨 경우에 성립합니다. 내부결재자는 그 결재행위를 통해 회사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서의 지위를 갖습니다. 그런데 만약 결재자가 문제를 인지하고도 묵인하거나, 명백한 위법 가능성을 알고도 승인하였다면, 이는 업무상 임무에 위배된 행위로 평가될 수 있고, 그 결과 회사에 손해가 발생하였다면 배임죄의 구성요건이 충족될 수 있습니다. 특히 사전 보고 없이 일방적으로 계약조건을 완화하거나, 특정 업체에 부당한 이익을 몰아주는 계약을 승인한 경우, 결재자는 단지 관리자의 위치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형사고발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판단의 기준점이 되는 것이 바로 **‘위임전결규정’**입니다. 위임전결규정은 회사가 업무의 성질, 중요도, 금액 등을 기준으로 권한을 위임하는 구조를 문서화한 것입니다. 실무자와 결재자 사이에 어떤 책임이 분배되어 있는지를 명확히 하여, 업무의 효율성과 책임의 투명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장치입니다. 예를 들어 5천만 원 이하의 계약은 부서장 전결, 그 이상은 본부장 결재를 요한다는 규정이 있다면, 이를 위반하여 하급자가 상급자의 권한 범위를 침해한 경우 결재 없이 체결된 계약은 무효가 되거나, 책임 소재가 분리될 수 있습니다.
또한 위임전결규정은 민사상의 책임 판단은 물론, 형사사건에서 배임의 고의 유무를 판단할 때도 중요한 해석 근거가 됩니다. 규정상 권한 밖의 업무에 대해 결재자가 이를 승인했다면, 그 자체로 임무위배의 징표가 되고, 반대로 권한 내에서 성실히 판단한 경우에는 책임이 경감될 수 있습니다. 결국, 위임전결규정은 조직 내부의 권한 배분을 기준으로 하여 책임의 수위와 범위를 가늠하는 기준선이 됩니다.
결재 시스템은 조직 내에서 책임과 판단을 분산하기 위해 설계된 장치입니다. 그러나 그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사전 검토나 판단 없이 기계적으로 승인만 반복되는 구조가 된다면, 회사 전체가 리스크에 노출됩니다. 그리고 그 리스크는 실무자보다 오히려 결재선에 있는 관리직에게 먼저 도달합니다.
실무자에게 드릴 수 있는 조언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내용을 모르는 문서에는 사인하지 마십시오. 시간에 쫓겨 ‘형식적 결재’를 하는 순간, 구조적 리스크가 발생합니다. 둘째, 의심이 가는 문서는 반드시 법무 또는 감사담당자와 상의하십시오. 혼자 판단하지 않는 것이 책임을 나누는 첫걸음입니다. 셋째, 결재란 행정 절차가 아니라 책임의 표현임을 인식하십시오. 결재란, 회사를 대표해 ‘이 문서대로 진행해도 좋다’고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많은 분들이 결재를 일의 끝으로 여기십니다. 하지만 법적으로 보았을 때 결재는 일의 시작점이며, 그 시작이 때로는 분쟁이나 수사의 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결재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이해 없이 결재하는 문화가 더 위험한 것입니다.
오늘 사인할 문서가 있다면, 그 문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서명이 어떤 구조적 책임을 수반하는지, 위임전결규정상 나는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한 번 더 확인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2025.04.18.
이 규 황
변호사 | 건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