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배상] 회사가 승인한 계약서를 임의로 변경해서 날인했다면, 직원의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회사의 업무 절차는 종종 귀찮고 번거롭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회사의 규모가 커질수록 계약 체결 절차 또한 여러 단계의 검토와 승인을 거쳐야 하는 만큼, 복잡하고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절차를 무시하고 임의로 회사가 승인한 계약서 초안을 변경하거나, 내부 보고와 다른 내용으로 계약을 변경하여 체결하는 등 내부절차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변경을 승인한 직원 개인이 막대한 법적 책임을 지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건축설계 실무를 하던 시절, 계약 체결의 디테일이나 내부 승인 절차가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도면을 그리는 데 집중하다 보면, 계약서의 조항 하나하나보다는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이 쏠리기 마련이었고, 계약은 그저 시작을 알리는 형식적 문서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협의와 승인 절차는 번거로운 행정 과정으로만 여겨졌고, 실무자는 ‘실질적 업무’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쉬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착각이었는지 절감합니다. 계약서에 당사자들이 날인하기 전에 진행되는 모든 내부검토 절차는 단순한 내부행정절차가 아니라, 수십억 원에 달할 수도 있는 손해를 예방하고, 나아가 임직원 개인의 책임을 방지하기 위한 방파제 역할을 합니다.
우리 민법은 기본적으로 직원이 업무상 저지른 잘못에 대해 회사가 먼저 책임을 지도록 하는 “사용자책임”(민법 제756조)의 원칙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회사가 제3자에게 부담하는 책임을 말할 뿐, 직원 개인의 내부 책임까지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직원이 회사의 내부 절차를 명백히 위반하고, 경영진에게 보고한 내용과 배치되는 계약서를 임의로 체결하여 회사에 심각한 손해가 발생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직원이 계약 내용을 고의적으로 변경하거나, 변경된 내용이 회사에 매우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이는 단순 실수가 아닌 중대한 과실이나 고의에 해당합니다.
계약서에 날인하기 이전에 반드시 내부적으로 최종 검토를 수행하는 조직의 수기 서명날인을 받아야 하는 절차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계약을 체결했다거나, 체결된 계약 내용은 이사회에 보고된 내용과 명백히 달랐다는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참작해 보았을 때에 직원 개인이 회사에서의 입지와 실적을 위하여 고의 또는 중과실로 내부절차를 위반하였다는 정황이 인정될 경우에 문제가 커집니다.
법원은 일반적으로 직원의 업무상 경과실에 대해서는 제한된 책임을 인정하지만, 중대한 과실이나 고의적인 행위가 인정되는 경우에는 직원 개인의 책임이 매우 무겁게 인정될 수 있습니다. 회사에 수십억 원의 손해가 발생한 경우, 그 책임의 범위가 몇백만 원이나 몇천만 원 정도로 제한되지 않고, 훨씬 큰 액수로 인정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다수의 판례에서는, 회사가 내부 규정을 통해 “경과실은 직원 개인을 면책하고, 중과실의 경우에만 책임을 묻는다”는 기준을 명시하고 있는 경우, 중대한 과실이나 고의가 인정되면 해당 직원에게 정관 또는 내규상의 책임 외에 민법상의 불법행위책임까지 물을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대법원 역시 임직원에 대한 내부 규정상의 책임 제한이 있다 하더라도, 고의 또는 중과실에 해당하면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반복적으로 판시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민법상 불법행위책임과 법인의 정관에 기한 손해배상책임과는 요건을 달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법인의 정관에서 임·직원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의 요건을 고의 또는 중과실로 제한하는 경우에 있어서 그러한 정관 규정이 위임관계에 기한 채무불이행책임을 묻는 경우에만 적용되고 일반 불법행위책임을 묻는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과실로 인한 책임의 부담에서 벗어나 충실하게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손해배상책임의 요건을 엄격하게 제한한 정관 규정의 취지가 몰각될 수 있으므로 법인이 임·직원에 대한 민법상 불법행위책임을 묻는 경우에도 그 주의의무의 정도는 고의 또는 중과실이 있는 경우로 제한된다.”
(대법원 2004. 11. 11. 선고 2003다2789 판결 참조)
이처럼 단순한 착오나 판단 미스가 아닌, 실무부서의 계약 담당 직원에게 부과된 명백한 주의의무를 현저히 위반하거나 내부 절차를 무시한 채 임의로 행동한 경우에는 ‘회사가 경과실 면책조항을 두고 있었더라도’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회사에서 그러한 규정을 두지 않는 경우에 더욱 주의해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고의로 내부규정을 위반하여 회사에 고액의 손해를 입힌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은 회사가 대신 져 주지 않는다는 점을 반드시 유념해야 합니다.
회사의 계약 절차는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직원과 회사 모두를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장치입니다. 절차를 생략하거나 무시하는 순간, 본인은 물론 회사 전체가 감당할 수 없는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계약 절차와 내규를 지키는 것은 스스로를 지키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조직의 일원으로서 책임의 범위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을 명심하고, 항상 신중한 업무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내 인생보다 중요한 실적이란 없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세요.
2025.04.15.
이 규 황
변호사 | 건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