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설계를 하는가(12)_자격의 가치
저는 건축사입니다.
설계사무소 실무 경험이 있는 변호사로서, 그동안 건축과 법률의 접점에서 여러 문제를 고민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고민 끝에, 저는 건축사 자격을 취득하고자 결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격이 있어야 비로소 말에 무게가 실린다는 사실을,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는 동안 누구보다 절실히 느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건축설계 업무를 수행하는 데에 건축사 자격이 꼭 필요한가?” 하는 질문이 심심치 않게 제기됩니다. 법률상 건축사만이 건축설계업을 개설하고 설계도서를 발급할 수 있지만, 실무적으로는 건축사 아닌 자가 실질적인 설계 전 과정을 담당하고 건축사는 날인만 하는 관행이 뿌리 깊습니다.
건축사 자격이 실질적으로 행사되지 않는 이 현실은 과연 상식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을까요.
건축사법 제10조 제1항은 건축사가 자기 명의로 업무를 수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제39조의2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성명을 사용하여 업무를 수행하게 하거나 자격증을 빌려주는 행위”를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형사처벌하고 있습니다. 이는 변호사법, 의사법 등 타 전문자격과 유사한 수준의 제재 규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건축설계 실무에서는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설계도서가 건축사보(건축사가 아닌 설계 직원)에 의해 작성되며, 건축사는 최종 납품 시 도장만 찍는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이러한 관행은 건축사법의 입법취지와 정면으로 충돌하며, 법적으로도 명백한 위법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대법원은 건축사의 명의대여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건축사의 자격과 그 업무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건축물의 질적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하는 구 건축사법의 입법취지나,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건축사의 자격에 관하여 엄격한 요건을 정하여 두는 한편 건축사가 아니면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의 설계 또는 공사감리의 업무를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그 본질적·핵심적 내용으로 하는 구 건축사법 관계 규정의 내용 및 면허증이란 면허수첩과 함께 ‘건축사로서의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는 증명서’인 점에 비추어 보면, 구 건축사법이 금지하고 있는 ‘면허증 대여’라 함은 타인이 그 면허증을 이용하여 건축사로 행세하면서 건축물의 설계 및 공사감리의 업무를 행하려는 것을 알면서도 면허증 자체를 빌려 주는 것이라고 해석함이 상당하다 할 것이다( 대법원 1979. 9. 25. 선고 78누210 판결, 대법원 1994. 12. 23. 선고 94도1937 판결, 이러한 점은 구 건축사법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현행 건축사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만일 건축사가 무자격자인 제3자가 자금을 투자하여 시설을 갖추고 그 건축사 명의로 건축사사무소의 등록신고를 하는 데에 자신의 면허증을 이용하도록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등록 후 건축사 자신이 그 건축사사무소에서 건축물의 설계 및 공사감리 등의 업무를 계속 수행하여 왔으며 무자격자가 건축사의 업무를 수행한 바 없다면, 면허증을 대여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대법원 1997.5.16. 선고 97도60 판결)”
이러한 판례는 “설계도서에 도장을 찍는 행위만으로는 건축사의 직무수행으로 볼 수 없다”는 법원의 해석을 명확히 드러냅니다.
현행 건축사법은 건축사의 업무범위를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건축사법 제19조는 “건축물의 설계와 공사감리에 관한 업무”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부수적 업무들을 열거하고 있지만, 각 업무의 구체적인 수행 범위, 방법, 그리고 책임의 주체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건축사 자격을 가진 자가 실제로 어디까지를 ‘직접 수행해야 하는지’, 무엇을 ‘보조자에게 위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무적 혼란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자격의 본질은 권한이 아니라 책임임에도, 법률이 그 책임의 범위를 불명확하게 두고 있는 이상, 형식적 자격 보유만으로 실질을 외면하는 구조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건축사의 실질적 개입 없이 설계 업무가 이루어지는 현재의 관행은, 제도 자체가 그러한 공백을 방치해 왔기 때문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건축사 자격에 사회적 책임을 부여하고자 한다면, 그 책임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를 법적으로 명확히 정립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건축주는 “건축사사무소”와 계약을 체결하지만, 건축사 본인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직원이 모든 설계도서를 작성하고 허가도 담당하며, 건축사는 전산 시스템에 로그인조차 하지 않습니다. 최종 납품 시 건축사 도장이 첨부되지만, 건축사 본인이 설계를 검토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건축주는 건축사 본인이 설계한 도서라는 전제 하에 수천만 원의 설계비를 지불하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 설계를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내부 문제를 넘어 계약의 신뢰 및 소비자의 권리 문제로 이어집니다.
변호사법은 변호사만이 법률사무를 수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변호사 아닌 자가 서면을 작성하거나 소송에 참여할 경우 형사처벌을 받습니다. 만약 변호사가 법률서면을 직접 작성하지 않고 사무장이 모든 소송자료를 작성하고 대응한다면, 이는 곧바로 “면허대여”로 처벌되며, 언론에서 ‘사무장 변호사’로 지목되어 사회적 비난을 받는 일도 허다합니다.
설계의 모든 과정을 직원에게 맡기고, 건축사는 단지 도장을 찍는 데 그친다면, 과연 그것이 면허대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제 건축사 자격을 둘러싼 사회적 정의와 책임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재고해 보아야 합니다.
건축사의 자격은 단지 설계도서에 도장을 찍을 수 있는 권한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건축의 안전과 공공성을 보장하라고 위임받은 책임입니다. 자격이 권리가 아니라 책임이라면, 그 책임 또한 행위책임의 원칙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건축사 자격의 실질적 쓰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단지 제도적 문제도, 실무적 문제도 아닙니다. 설계라는 전문영역에 대한 사회의 신뢰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자격은 장식이 아닙니다. 자격이란, 그 자격에 걸맞은 책임과 실천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에게만 사회가 부여하는 실질적인 의무의 이름이자 신뢰의 증표입니다.
저는 이제서야, 자격을 가진 자로서 이러한 문제제기를 정면으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다음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납품도서를 넘길 때, 그 안에 담긴 책임도 함께 전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건축사란 이름이, 단지 도장을 찍는 직책이 아니라 설계를 결정하는 사람의 이름이기를 바랍니다.
2025.04.09.
이 규 황
변호사 | 건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