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사정

건축사 · 2023. 7. 8.

최고의 회사에서 건축가의 꿈을 펼치고 싶었던 신입사원이 돌연 설계를 그만두고 법조인이 되기로 결심한 동기 중 하나는, 발주자에게 혹독한 갑질을 당하는 건축가 집단에 대한 연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설계하시는 분들은 너무나도 잘 아실 것이고 설계쟁이가 주변에 있는 분들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설계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은 미련하게 일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설계하는 사람들은 소위 ‘어른들의 사정’같은 건 잘 모릅니다. 소년 만화 주인공처럼, 과장을 보태 미켈란젤로처럼, 오로지 작품만을 위해 목이 부러지고 허리가 끊어질 때까지 선을 그으며 살아갑니다. 참으로 순진합니다. 수억 원짜리 스포츠카를 몰고 온 발주자가 돈이 없다며 설계비 이야기를 얼버무려도 묵묵히 도면을 그려 건네줍니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도 돈을 받지 못해 변호사를 찾아가 보아도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이미 시행사는 폐업한 지 오래이고, 등기부등본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동네의 유명한 아파트 주소가 대표이사 이름 밑에 적혀 있습니다. 담당자 누구도 연락을 받지 않는 것은 물론입니다.

설계는 참 재미가 있습니다. 밥을 굶어도 설계를 그만두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말이지요. 대단한 건축가들은 자기가 살 집도 아니지만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수많은 밤을 지새워 결국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 건축가들은 하나같이 ‘작품만 보아도 배가 부르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경지에 오르지 못하고 설계를 그만두었기에, 아마 평생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평생을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던 아버지를 바라보고 자라 왔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의 설계판이 어땠는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제가 어깨 너머로 지켜본 1990년대의 설계판도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건축가 뒤에는 어디에나 ‘어른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남들보다 일찍 알게 되었지요.

운이 좋아 진실된 건축주를 만나면 참으로 행복한 일이겠으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사무소가 영세한 설계사무소여서 그랬던 것일까요? 제가 있던 설계사무소는 국내에 몇 없는 대형 설계사무소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발주자에게 혹독한 갑질을 당하고는 했습니다. 저녁에 요청하여 ‘내일까지 작업해 달라’는 정도는 일상이고 차마 공개적으로 여기에 적을 수 없는 일들도 많았습니다. 그 와중에도 협업 중인 해외 설계사무소에게는 무척 깍듯하던 발주처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한국 건축가들이 해외사보다 능력이 부족해서 사회적 지위가 낮아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오래된 생각이며, 또한 대단히 민감한 이야기입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만, 서론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길어지는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어른의 사정’이라는 이유가요.

2023.07.08.

변호사 이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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